타이완을 ‘소(小)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.
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.로저 블렌치가 『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지도』(2009)에서 추정하는 이 어족의 최대 확장기 분포 지역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안지대가 많이 들어 있었다.
1879년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개편할 때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.7~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~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.타이완이 머물러 있던 해양문명권을 중국에서는 ‘남도(南島) 문명이라 부른다.
이 글에서는 남양(南洋)으로 쓰겠다.류구열도 중 오키나와현에 속한 것은 남쪽의 절반이다.
추측건대 한반도와 일본 남부를 포함하는 동아시아문명권의 7세기경 성립에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다.
특히 16세기 중엽 일본의 중국 조공이 끊기면서 류구왕국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.잡아간 왕과 신하들을 2년 후 돌려보내고 구메무라를 오히려 더 키워주었다.
(‘-nesia는 폴리네시아·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‘섬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다.중국의 관심은 배경의 일본 때문이었다.
그 남쪽의 오키나와섬에는 그 사이에 삼산(三山)시대를 거쳐 류구국이 세워졌다.언어 다음으로 남양문명이 널리 공유한 요소는 항해술이다.